가야문화권 유적조사연구

중요선사, 역사유적에 대한 기획 학술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사적지의 정비, 복원을 위한 조사 및 사적지 지정을 위한 사전조사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개발이나 도굴 등으로 훼손, 멸실될 우려가 있는 유적과 민원 발생의 소지가 있는 긴급한 사안의 중요 유적도 조사하고 있다.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咸安 阿羅加耶 推定 王宮址)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목록
유적명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시대 삼국시대
지정 비지정 조사기간 2018년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66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해발 약 25m~35m의 낮은 구릉지에 해당한다. 이 곳은 1587년에 편찬된 조선시대 읍지 『咸州誌』卷之一古跡條‘古國遺址白沙里扶尊亭之北有古國之墟周回一千六百六尺土築遺址至今宛然世傳伽耶國舊基云’을 근거로 傳안라왕궁지로 추정되었으며, 1656년 동국여지승람에서는 ‘古國墟’라 하였다.
1916년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에는 이 일대의 도면과 여러 장의 사진이 남아있으며, 초석이 확인된 작은 가야동을 ‘傳王宮址’로 추정하였다. 현재 토축 성벽과 주변 건물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 중에 있으며, 아라가야 왕성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토축은 정교하게 쌓아 올린 대규모 성벽으로 확인되었으며, 목탄층은 성벽 축조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토성 내부에서는 목책열과 건물지, 방형의 수혈유구가 발견되었고, 유물은 고배, 기대, 연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1920년 조선고적도보
조사구역 전경

함안 우거리 토기생산유적(咸安 于巨里 土器生産遺蹟)

함안 우거리 토기생산유적 목록
유적명 함안 우거리 토기생산유적 시대 삼국시대
지정 비지정 조사기간 2018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연구과제 “가야 고분과 유물 연구”와 관련하여 2018년에 기획된 발굴조사로서, 가야 토기의 생산 및 유통 체계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조사의 일환으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사지역이 위치한 함안 법수면 우거리 일대는 가야 토기 산포지로 알려져 있으며, 가마 생산지가 밀집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 연구소는 2018년 초 우거리 일대의 토기생산유적 추정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진행하여 조사지역을 선정하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였다. 조사 결과 길이 11m에 이르는 대형 토기 가마터와 폐기장이 함께 확인되었으며, 이에 대한 구조 및 내부 토층 퇴적 양상, 층위별 출토유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가야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연구는 주로 고분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데 반해, 이번 토기 생산유적 발굴조사 결과는 아라가야의 토기 생산과 유통, 나아가 교역 경제 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가야 고분과 유물 연구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적 전경(좌-가마, 우-폐기장 / 남동-북서)
가마 전경(남동-북서)

김해 봉황동유적(김해 봉황동유적)

김해 봉황동유적 목록
유적명 김해 봉황동유적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2015년 ~ 현재

김해 봉황동 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복합유적으로 대성동고분군과 수로왕릉의 남쪽, 봉황대 구릉 및 주변 일대에 분포한다. 이곳은 금관가야(42~532년)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현재 김해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적을 포함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봉황대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00년 초에 발굴 조사되어 ‘김해기’ 패총의 표지적인 유적으로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확인된 ‘김해식 토기’는 한국 고고학 편년연구의 지표가 되었으며, 봉황동 유적 일대에서 판축상 5세기 대의 토성이 확인됨에 따라 이 지역을 금관가야 고도(古都)의 중심지로 추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삼국시대 건물지와 소성유구, 수혈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3호 건물지는 먼저 만들어져 있던 5호 건물지를 부수고 만들어졌다. 건물지의 외곽으로는 벽기둥을 세웠고, 이를 모래를 섞은 점토를 둘러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점토를 깔아 다져 지면을 고르게 정지하였다. 내부에는 크고 작은 수혈(구덩이)들이 다수 확인되었으나 용도를 알 수 없다.
발굴조사에서는 시루와 항아리 같은 일상용토기와 굽다리접시 등과 같은 의례용 토기 및 송풍관 같은 생산 관련 유물도 확인되었다. 또한 소량의 장신구(굽은옥, 유리구슬)와 육,해상 동물의 유체가 다수 출토 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의 시기는 4~5세기 대의 것으로 판단되며, 향후 추가 조사를 통해 더 많은 유물을 확보하여, 유적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힐 예정이다.

봉황동 유적 전경
1호 소성유구

창녕 교동고분군 (昌寧 校洞古墳群)

창녕 교동고분군 목록
유적명 창녕 교동고분군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2009년 ~ 현재

창녕 교동고분군은 계성고분군, 영산고분군과 함께 창녕지역 대표 고분군으로 송현동고분군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2009년부터 2010년 실시한 주차장 정비구역 내 고분 발굴조사는 1918~19년 일제강점기(9기 조사) 및 1992년 동아대학교 발굴(5기 조사) 이후 18년만에 실시한 것으로, 창녕군이 ‘교동고분군 주차장 정비사업’ 진행 중에 고분이 있음을 확인, 유적 보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결과, 봉분 직경 19m에 이르는 중대형의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1기와 조선시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관옥, 은제허리띠와 고리자루큰칼을 차고 있었으며, 부장칸에는 각종 토기류, 마구류 및 순장인골편 등이 출토되어 고대 매장의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은제허리띠와 장식은 완형이 세트로 출토되어 출토 예가 드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조사한 교동 88호분은 개석 노출에 따른 고분의 추가 훼손을 막기 위해 실시되었다. 고분의 잔존 규모는 직경 17.6m(남북), 높이 약 3m이고, 봉토는 분할 구획 성토하였으며, 호석은 동쪽 절반만 남아 있다. 횡구식석실분으로 석실은 남북 길이 6.7m, 동서 너비 1.3m, 높이 2.0m이며, 바닥에는 2개의 시상석이 마련되어 있다. 도굴이 되었으며, 남단벽과 중앙부에서만 토기류 및 철기류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목마산 기슭에 교동고분군 내 미정비 지역인 39호분 및 주변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함안 성산산성 (咸安 城山山城)

함안 성산산성 목록
유적명 함안 성산산성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1991년 ~ 2016년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은 가야읍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조남산(鳥南山, 해발 139.4m) 정상부에 축조된 삼국시대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4km 정도이다. 함안을 중심으로 한 고대 아라가야(阿羅伽耶)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는 사적 함안 말이산고분군 등 당시 수장급(首長級) 고총고분이 인접해 있어 아라가야의 정치 군사적 주요거점으로 추정되어 왔다. 이에 산성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1991년부터 현재(2015년)까지 총 17차에 걸쳐 학술발굴을 연차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신라의 축성기법과 관련 있는 단면 삼각형의 외벽보강구조물(外壁補强構造物)을 갖춘 협축식석성(夾築式石城)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 남문지(南門址)와 동문지(東門址)의 위치 및 형태를 확인하였고, 수구 및 외벽보강구조물, 내벽(內壁)의 축조분기점 등 체성구조(體城構造)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성 내 저수지(貯水池) 발굴을 통하여 호안석축(護岸石築)과 목주시설(木柱施設) 등을 갖춘 대규모 저수지 및 성벽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저수지 하부와 동성벽 주변에 식물유기체를 인위적으로 매립한 부엽공법 등이 확인된 것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엽공법이 확인된 동성벽 주변 유기물 매립층에서는 나무방망이, 빗 등 많은 소형 목제품과 함께 묵서목간(墨書木簡)이 현재까지 260여 점이 출토되어 국내에서 목간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 목간에는 신라의 관등명[官等名 : ‘一伐’, ‘一尺’ 등 外位]을 비롯하여 많은 지명(地名)이 기록되어 있어 한국고대사(신라사)의 지방행정조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두루마리 문서에 꽂아 쓰는 제첨축(題籤軸)과 붓, 삭도(削刀) 등 중요유물이 다량의 동식물유체와 더불어 수습되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 (高靈 池山洞古墳群)

고령 지산동고분군 목록
유적명 고령 지산동고분군(518호분)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2012년 ~ 2013년

사적 지산동고분군은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원에 분포하고 있는 대가야의 최고지배집단 묘역이다. 발굴조사 결과,삼국시대 수혈식 석곽분 1기가 조사되었으며 주곽을 비롯하여 순장곽 등 총11기의 석곽이 확인되었다. 내부에서는 금동관편,금동제 수하부이식,금동제 마구류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다.

창녕 영산고분군(昌寧 靈山古墳群)

창녕 영산고분군 목록
유적명 창녕 영산고분군 시대 삼국시대
지정 경상남도 기념물 조사기간 2010년 ~ 2012년

경상남도 기념물 창녕영산고분군은 창녕군 영산면 동리 및 죽사리 일원에 분포하고 있으며, 교동고분군, 송현동고분군 및 계성고분군 등 창녕지역을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 수혈식석곽분 1기와 주변으로 봉분이 남아 있지 않는 수혈식석곽묘 10기, 횡구식석실묘 1기, 수혈유구 1기 및 고려시대 기와가마 1기, 조선시대 축대 1기와 추정 담장지 등이 확인되었다. 봉분 축조기술, 매장주체부 구조,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기존의 수혈식석곽에서 횡구식석실로 변모하는 5세기 중엽 무렵 창녕지역 고분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창녕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西三層石塔)

창녕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목록
유적명 창녕 술정리 동서삼층석탑 시대 통일신라시대
지정 동탑-국보, 서탑-보물 조사기간 2008년 ~ 2009년

창녕 술정리 동서삼층석탑은 창녕군에서 주변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석탑 기저부 구조 및 안전성 검토와 석탑 관련 유구 확인을 위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동삼층석탑 조사에서는 탑 기저부를 돌과 흙을 교대로 섞어가면서 판축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 기초부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탑의 서편지역에서는 4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어 사찰의 가람배치 등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또한 “松林寺”명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서삼층석탑의 기저부 조사에서는 바닥에 점질토를 다진 후 주변에서 채취한 사질토와 점질토를 교대로 다져 기저부를 조성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특히 탑 하층기단 아래에서 금동제풍탁(金銅製風鐸) 1점이 출토되었다.

창녕 송현동고분군 (昌寧 松峴洞古墳群)

창녕 송현동고분군 목록
유적명 창녕 송현동고분군(昌寧 松峴洞古墳群)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2004년 ~ 2008년

창녕 송현동고분군(松峴洞古墳群)은 교동고분군 및 계성고분군과 함께 창녕지역의 대표적 고분군으로 직경 20m 이상의 대형 고분과 중소형 고분들이 목마산성의 남쪽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표형분(瓢形墳)인 6·7호분과 15~17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및 고분군 주변의 목마산, 화왕산 일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여 34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송현동 6 · 7호분은 대략 5세기 말 ~ 6세기 초에 만들어진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석실을 중심으로 봉토를 방사상으로 구획성토한 축조수법이 확인되었고, 석실 내부에서는 각종 토기류와 다양한 금속 · 목제유물이 총 600여 점 출토되었다. 금귀걸이, 고리자루큰칼, 화살 무더기를 비롯하여 안교, 재갈, 등자, 교구, 금구(金具), 행엽, 운주 등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7호분에는 녹나무로 제작된 목관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어 학계에 크게 주목받고 있다. 목관 주변에서는 칠기, 금동교구 등의 유물이 나뭇잎과 같은 유기물에 덮인 상태로 출토되었고, 석실의 양 단벽 쪽에는 굽다리뚜껑접시 등의 토기들이 광주리 안에 담긴 채 출토되어 당시 매장풍습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15호분에서는 금동관, 금반지, 금구슬 및 각종 마구류와 함께 순장인골이 출토되었는데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고고학, 법의학, 해부학, 유적학, 화학, 물리학, 조형학 등 인문학 및 자연과학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국내 최초 학제간 융합연구를 실시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고대 인체 복원 및 당시 매장풍습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성 내산리고분군 (固城內山里古墳群)

고성 내산리고분군 목록
유적명 고성 내산리고분군(固城 內山里古墳群)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1997년 ~ 2006년

고성 내산리고분군(內山里古墳群)은 적포만(赤浦灣) 해안 일대의 낮은 구릉(해발 10~20m)에 65기 이상의 중 · 대형 봉토분(封土墳)이 밀집 분포하는데, 삼국시대 소가야(小伽耶) 지배집단의 중심묘역 중 하나이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7차년에 걸친 학술발굴 결과, 고분 축조집단의 실체 및 당시 문화상과 더불어 고분군의 구조적 특징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즉, 봉분의 중앙에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또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을 주곽(主槨)으로 설치하고, 그 주위에 다수의 소형 석곽과 옹관을 배치하는 다곽식(多槨式) 구조는 내산리고분군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대표적인 축조방식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고성 송학동고분군, 율대리고분군, 연당리고분군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지역의 특징적인 매장풍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제8호분을 비롯한 대다수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흑갈색점질토를 일정한 두께로 깔아 정지(整地)한 평면 원형의 토대(土臺) 위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하는 분구묘(墳丘墓)는 이 지역의 독특한 고분 축조방식으로 볼 수 있다. 출토유물 가운데는 굽다리접시[三角形透窓高杯],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 등과 같은 서부경남의 가야후기 토기양식 외에, 굽다리목긴항아리[瓔珞附臺附長頸壺]와 같은 신라계토기와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와 같은 백제계토기도 다수 출토되고 있다. 이로써 6세기 전반대를 전후하여 내산리고분군을 축조한 정치체가 해안에 근접한 지리적 조건을 배경으로 당시 활발한 대외교류를 다각도로 실시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산청 지곡사지 (山淸 智谷寺址)

산청 지곡사지 목록
유적명 산청 지곡사지(山淸 智谷寺址) 시대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지정 경상남도 기념물 조사기간 2002년 1월 ~ 2002년 6월

산청 지곡사(智谷寺)는 신라 진흥왕(眞興王)때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전기에는 선종(禪宗)의 5대 산문(山門) 중 하나였으며, 진관(眞觀 ; 912~964)과 혜월(慧月 ; 10~11세기) 등에 의해 여러 차례 중흥을 이루며 19세기경까지 법등을 유지했던 유서 깊은 사찰로 지리산 웅석봉(熊石峰) 북사면 아래에 위치한다. 지곡사지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그 실체를 밝혀주는「智谷寺」銘 내림새가 출토되었으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금당지(金堂址)에서는 불상대좌(佛像臺座)와 소조불상(塑造佛像)이 노출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수조와 비의 귀부가 사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석탑 부재가 금당지의 중심축선상의 뒤편 구릉에 남아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 경주남산 등지에서 확인되는 망탑(望塔)을 둔 산지가람(山地伽藍)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잘 짜여진 축대 위에 설치된 건물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와를 비롯하여 고려, 조선시대의 와전류 및 자기류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출토양상과 가람배치로 볼 때 지곡사는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울산 운흥사지 (蔚山 雲興寺止)

울산 운흥사지 목록
유적명 울산 운흥사지(蔚山 雲興寺址) 시대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지정 조사기간 2001년 7월 ~ 12월

울산 운흥사(雲興寺)는 신라 진평왕(眞平王)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며, 절터는 양산시와 언양읍의 경계를 이루는 정족산(鼎足山)의 동쪽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운흥사는 조선시대에 목판(木版)의 개간(開刊)으로 유명했으며 현재 양산 통도사에 16종 670여 판이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운흥사지 발굴조사는 사역의 중앙에 해당하는 추정 금당지(金堂址) 일대에 한정하여 실시하였고, 그 결과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7동과 석축유구, 배수로 등을 확인하였다. 유물은 와전류, 자기류, 금속류, 불상편 등 180여 점을 수습하였는데, 그중「雲興」銘내림새를 비롯하여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연호나 간지가 새겨진 와당과 석조물은 운흥사의 실체를 밝혀주고 있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동향(東向)의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었다가 이후 3×3칸의 규모로 개축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그 외 온돌구조와 박석(薄石)시설 등이 정연하게 남아 있는 대형 건물지 등도 조사되었다. 운흥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해당하지만, 일부 통일신라시대 말기와 고려시대의 기와 및 청자가 포함되어 있어 사찰의 존속시기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다.

창원 상남선사유적 (昌原 上南先史遺蹟)

창원 상남선사유적 목록
유적명 창원 상남선사유적(昌原 上南先史遺蹟) 시대 청동기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9년 1월 ~ 2000년 2월

창원분지(昌原盆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상남동과 토월동지역은 고인돌[支石墓]과 조개무지[貝塚]를 비롯한 선사시대 문화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상남상업지구 재개발사업과 관련하여 모두 네 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상남선사유적은 국내외에서 찾아보기 힘든 청동기시대의 제사유구(祭祀遺構)와 2중의 환호유구(環壕遺構)로 구성되어 있어, 북서쪽에 인접한 상남지석묘(’98년 조사)와 더불어 대단위 복합유적임을 알 수 있다. 하천 주변의 자연도랑을 이용한 일종의 물가 제사유구[水邊祭祀遺構]에서는 토기의 바닥 중앙에 의도적으로 작은 원형구멍을 뚫어 폐기한 점과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의 집중적인 파쇄현상, 그리고 그물추[漁網錘]와 절단된 석기(石器)가 수습되는 등, 청동기시대에 행해진 다양한 의례행위(儀禮行爲)에 대한 새로운 검토의 여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환호(環壕)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방어적 기능보다는 취락 내 특정장소에 대한 경계적인 의미를 갖고,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제사적(祭祀的)인 기능이 더해졌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유적은 주로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와 꼭지모양 파수가 부착된 발형토기, 이와 공반 출토되는 돌화살촉[石鏃]과 간돌도끼[磨製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의 특징으로 보아 대략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중심연대가 서로 중복되는 상남지석묘와 더불어 이 지역의 선사문화 연구에 중요한 학술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산청 단속사지 (山淸 斷俗寺址)

산청 단속사지 목록
유적명 산청 단속사지(山淸 斷俗寺址) 시대 통일신라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9년 10월 ~ 12월

산청 단속사지(斷俗寺址)는 지리산 웅석봉(熊石峰)의 남쪽기슭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사찰터이다. 현재 사역(寺域)으로 추정되는 주변은 민가와 전답이 자리하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동 · 서 삼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단속사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때에 이순(李純)이 창건하고 신충(信忠)이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현존하는 삼층석탑은 9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9년 석탑 북편의 정비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민가 건물지 2동을 확인하였고, 자기류, 기와류, 소불상편(小佛像片) 등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울산 병영성(蔚山 兵營城)

울산 병영성 목록
유적명 울산 병영성 (蔚山 兵營城) 시대 조선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1999년 8월 ~ 10월

울산 병영성(兵營城)은 조선시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되어 19세기 중후반까지 사용되었던 석축성이다. 성곽은 서북쪽 치술령(해발 765m)과 동쪽의 동대산(해발 444m) 사이로 흐르는 동천(東川) 서편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해안에서 경주(慶州)로 통하는 길목을 내려다보는 지형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다. 병영성의 북문지(北門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체성(體城)과 문지를 감싼 옹성(甕城), 그리고 해자(垓子)로 추정되는 시설물 일부가 확인되었고, 토기 · 자기 · 와전류 등 24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북문지는 이미 훼손된 상태였으나 그 동편에 체성이 거의 하단부만 남은 채 확인되었고, 성문을 방어하는 주요시설인 옹성이 체성 외벽에 반원형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체성과 옹성은 모두 내외협축식(內外夾築式)으로 축조되었고, 7~8m 폭의 내 · 외벽 사이 공간에는 막돌을 견고하게 채워다졌음을 확인하였다. 체성 외벽에서 약 16m 떨어진 곳에서는 해자의 기저부 시설로 보이는 석열이 2~3단 정도 남아 있다. 울산 병영성은 입지의 우월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존재했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으로, 이 시대 성곽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창원 상남지석묘 (昌原上南支石墓)

창원 상남지석묘 목록
유적명 창원 상남지석묘(昌原 上南支石墓) 시대 청동기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1997년 12월, 1998년 10월 ~ 11월

창원 상남지석묘(上南支石墓)는 창원분지 중앙의 얕은 구릉 정상부에 단독으로 설치된 전형적인 기반식(碁盤式) 또는 남방식(南方式)지석묘이고, 인접한 구릉 사면에서는 개석식(蓋石式)으로 추정되는 지석묘 6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간돌화살촉[磨製石鏃] 22점과 함께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등 토기편 일부가 수습되었다. 구릉 정상에 위치한 상남지석묘는 주변의 소형 지석묘의 하부구조와는 달리, 깊이가 2m에 이르는 이단묘광(二段墓壙)에 잘 짜여진 석곽(石槨)을 갖추고 개석(蓋石)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1, 2차 개석 사이에는 적석시설(積石施設)이 이루어져 있고, 상석(上石)은 길이 270cm, 너비 185cm로 대형이며 70여 개의 알구멍[性穴]이 남아 있었다. 상남지석묘는 입지, 규모 및 구조,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미루어보아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대에 축조된 이 지역 최고수장층(最古首長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주 대평리선사유적 (晋州 大坪里先史遺蹟)

진주 대평리선사유적 목록
유적명 진주 대평리 선사유적 (晉州 大坪里 先史遺蹟) 시대 청동기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7년 1월 ~ 1999년 8월

진주 남강(南江)변과 주변 평야지대에 드넓게 자리한 남강댐 수몰지구 문화유적(총 면적 71,953㎡)은, 16개 발굴기관에 의해 진주시 대평면 · 귀곡동, 산청군 단성면, 사천시 곤명면 등으로 나뉘어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대대적인 합동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 20여 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각종 중요유물이 수습되었다. 우리 연구소에서도 대평리(大坪里) 어은2지구와 옥방8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 집자리[住居址] 67동을 비롯하여 돌널무덤[石棺墓], 경작지, 야외 화덕자리[爐址], 집석유구(集石遺構)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공열문(孔列文)과 구순각목문(口脣刻目文)이 시문된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無文土器]와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등의 토기류와, 간돌화살촉[有莖式磨製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의 석기류, 그 외 장신구류와 같이 당시 문화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각종 자료를 확보하였다. 남강댐 수몰지구 선사유적 중 가장 주목되는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대규모 환호(環壕)와 집자리, 경작지, 무덤군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대단위 마을유적이 확인되었고, 특히 옥방1지구에서는 이중의 환호와 목책시설(木柵施設)이 결합된 형태가 확인되어 이채롭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내부에 화덕을 설치한 (세)장방형 주거지와, 내부에 작업공간을 두고 야외에 화덕을 설치한 (말각)방형 · 원형 주거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옥방8지구의 경우, 주거지 내부의 작업용 수혈(竪穴) 주변에서 당시 석기제작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석기 가공용 숫돌과 부재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집자리 주변에서는 돌널무덤[石棺墓], 고인돌[支石墓], 움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확인되었고, 어은2지구에서는 석기제작소 또는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집석유구도 확인되었다. 한편 청동기시대 취락유적 주변에서는 당시 경작하였던 논과 밭이 발견되어 농경의 실질적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어은지구에서 2,000평, 옥방지구에서 1,800평의 밭이 발견되었는데, 울산 옥현유적과 함께 현존 최고(最古)의 경작지로 주목받고 있다. 경작지와 함께 탄화미(炭化米), 도토리 등의 곡물과 괭이 · 호미 등 경작도구가 출토되어 당시 농경생활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울산 조일리고분군 (蔚山 早日里古墳群)

울산 조일리고분군 목록
유적명 울산 조일리고분군(蔚山 早日里古墳群) 시대 삼국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6년 11월 ~ 1997년 6월

울산 조일리고분군(早日里古墳群)은 울산과 양산의 경계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120~140m의 낮은 구릉 일대에 조성된 대규모 삼국시대 분묘유적이다.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신라와 가야의 주요 접경지대이자 고대 교통의 요충지로 추정되던 곳이다. 1996년 공장부지로 선정된 유적지에 대한 긴급발굴 결과, 덧널무덤[木槨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독무덤[甕棺墓] 등 138기의 매장유구(埋葬遺構)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토기 및 철기를 비롯하여 의기(儀器), 장신구(藏身具) 등의 유물도 수습되었다. 특히 금동관(金銅冠), 금귀걸이[金製太環耳飾], 둥근고리칼[金銅母子三葉文裝飾大刀] 등은 고분축조집단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사된 22기의 목곽묘는 크게 두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각각 중심에 3기의 목곽을 병렬로 설치하고 그 주위에 다수의 목곽묘를 등고선방향으로 배치한 형태가 확인되어 주목된다. 평면형태는 너비가 1.5m를 넘지 않는 세장방형이며, 유물은 한쪽 또는 양쪽 단벽에 치우쳐 출토되었다. 목곽묘에 뒤이어 축조된 수혈식석곽묘는 단곽식(單槨式)와 다곽식(多槨式)으로 나누어지는데, 반원상의 호석(護石)과 주구시설(周溝施設)이 일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봉분(封墳) 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곽묘의 경우 호석 또는 주구를 조성하거나 일정한 범위 내에 2기 이상의 묘곽을 친연관계에 따라 근접 축조한 형태로 말할 수 있는데, 조일리유적의 경우 2기의 묘곽이 병렬상으로 구성된 합장묘의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5기가 구성된 것도 있다. 이러한 양상은 낙동강 동안지역의 수혈식석곽묘에서 주로 확인되는 가족묘(家族墓)적인 배치형태와 유사하다. 울산 조일리고분군의 조성연대는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엽에 해당하며, 고분의 주체는 비슷한 시기의 신라성곽으로 알려진 양산 순지리토성(蓴池里土城)의 축조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창원 봉림사지 (昌原 鳳林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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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창원 봉림사지(昌原 鳳林寺址) 시대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지정 경상남도 기념물 조사기간 1995년 ~ 1998년

창원 봉림사(鳳林寺)는 통일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때에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가 창건하였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제8선문으로 번창한 대선찰(大禪刹)이다. 절터는 창원 봉림산(해발 295m)의 남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진경대사의 부도와 탑비(보물 제362 · 363호), 그리고 삼층석탑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이다. 4차년에 걸친 봉림사지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 등 주요 건물지와 석탑지, 연못, 배수시설이 확인되었고,「鳳林寺」銘 기와편이 수습되어 봉림사의 실체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출토유물은 명문와(銘文瓦)를 비롯한 와전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금동불상 1점과 청동불상 1점도 수습되었다. 석탑지 조사에서 수습된 상층기단 면석과 하층기단 갑석은 창원시내 상북초교로 옮겨진 고려 초 삼층석탑의 부재로 확인되었다. 봉림사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다양한 형식의 내림새와 막새를 통하여 볼 때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봉림사의 중창(重創)이 여러 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丙寅年鳳林寺瓦造」銘 기와의 ‘병인년(丙寅年)’을 서기 906년(신라 효공왕 10년)으로 볼 때, 봉림사가 진경대사의 입적(入寂) 이전에 가장 번창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普齊寺」銘 조선시대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봉림사가 보제사로 개명되어 조선시대까지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창원 가음정동지석묘 (昌原 加音丁洞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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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창원 가음정동지석묘(昌原 加音丁洞支石墓) 시대 청동기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3년 7월 ~ 8월

창원 가음정동지석묘(加音丁洞支石墓)는 가음정동고분군과 패총이 있는 당산(堂山)의 북쪽 약 400m 지점에 있으며, 창원시에 의한 상남개발지구 부지조성 과정에서 덮개돌[上石]이 제거된 고인돌[支石墓] 1기를 대상으로 긴급발굴을 실시하였다. 덮개돌은 일부 파손된 상태였으나 대형에 속하며 여기에는 약간의 알구멍[性穴]이 남아 있었다.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3매의 개석을 갖춘 지하식 석곽(石槨)이며, 자갈을 깔아 다진 바닥에서 민무늬토기[無文土器] 파편 일부가 수습되었다.

함양 손곡리고분군 (咸陽 蓀谷里古墳群)

함양 손곡리고분군 목록
유적명 함양 손곡리고분군(咸陽 蓀谷里墳墓群) 시대 삼국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3년 3월

함양 손곡리분묘군(蓀谷里墳墓群)은 1993년 주민이 경작도중 채집된 토기를 창원대박물관에 신고하여 확인된 유적으로, 현지조사 결과 유적의 훼손이 심한 상태여서 긴급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삼국시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4기를 확인하였고, 금 · 은제 귀걸이[耳飾]와 둥근고리큰칼[環頭大刀]을 비롯하여 토기, 철기류 등 60여 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유적은 경호강(鏡湖江)의 상류인 임천강변의 사질퇴적구릉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석곽은 주로 냇돌을 사용하여 쌓고 모서리부분은 둥글게 처리하였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함양 상백리고분(上栢里古墳)과 백천리고분군(白川里古墳群)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당시 이 지역 고분의 석곽 축조기법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유적의 조성연대는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를 비롯한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미루어보아, 대략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주변지역에서는 많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채집되어 선사시대의 유구도 분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 도항리 · 말산리고분군(咸安 道項里 · 末山里古墳群)

함안 도항리 · 말산리고분군 목록
유적명 함안 도항리 · 말산리고분군(咸安 道項里 · 末山里古墳群) 시대 삼국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1992년 ~ 1996년

함안 도항리(道項里) · 말산리고분군(末山里古墳群)은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라가야(阿羅伽耶) 최고 지배자집단의 중심묘역이다. 일명 ‘말이산고분군’이라고도 하는데 가야읍 도항리와 말산리 일대의 길게 뻗은 길이 약 2km의 능선 위에 수십 기의 대형 봉토분들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1992년부터 5차년에 걸친 학술발굴을 실시한 결과 60여기의 매장유구와 2,000여점에 달하는 각종 토기 및 철기류가 수습되었다. 이 고분군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널무덤[木棺墓]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대형의 덧널무덤[木槨墓]으로 발전하고, 대체로 5세기경에는 세장방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을 거쳐, 마지막 단계에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교체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널무덤은 Ⅱ자 모양으로 장벽(長壁)의 긴 판재 사이에 짧은 판재를 끼운 형태로 김해, 창원지역의 통나무형 널무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널무덤의 확인은 함안지역의 고대문화가 무문토기시대 이래로 단절됨이 없이 계속적으로 성장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덧널무덤은 4세기에서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 단계부터 아라가야지역 토기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화염문투창고배(火焰文透窓高杯)의 등장과 함께, 고배의 형태도 통형식(筒形式)에서 나팔식(喇叭式)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구덩식덧널무덤은 본격적인 대형 봉토의 축조가 시작되는 단계의 묘제이다. 특히 8호분은 5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높이 3.5m에 이르는 대형봉토와 국내 최대급의 수혈식석곽묘를 채용한 것, 석곽 내부에 6인의 인골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함안지역 최고지배자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석곽 내부에는 벽감과 같은 시설이 발견되어 고구려 및 백제와의 교류를 추정할 수 있다. 아라가야지역 고분문화의 말기에 나타나는 묘제인 굴식돌방무덤은 다른 가야지역과 비슷한 양상이 보이며, 이전의 토기문화가 퇴화되는 등의 변화가 보인다. 함안 도항리 · 말산리고분군에서는 신라 및 다른 가야지역의 지배자급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관(金冠), 금동관(金銅冠) 등의 금제(金製) 유물이 보이지 않고, 고리자루큰칸[環頭大刀], 갑옷류 및 마구(馬具)류 등의 철기유물이 부장되는 현상을 통해 고대 아라가야의 철 생산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함안 윤외리고분군 (咸安 輪外里古墳群)

함안 윤외리고분군 목록
유적명 함안 윤외리고분군(咸安 輪外里古墳群) 시대 삼국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2년 11월 ~ 12월

함안 윤외리고분군(輪外里古墳群)은 1992년 도굴(盜掘)로 인해 유적이 알려짐에 따라 같은 해 11~12월에 걸쳐 긴급수습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유적에서는 모두 7기의 덧널무덤[木槨墓]이 확인되었고 100여 점의 토기와 철기류가 수습되었다. 그 중에는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문양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무늬장식뚜껑[有文蓋]과 이형토기(異形土器)도 포함되어 있다. 유구는 나지막한 야산의 정상부와 사면에 등고선 방향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봉분(封墳)은 모두 삭평되고 세장한 묘광(墓壙)의 기저부만 남아 있다. 통형의 굽다리접시[筒形高杯]와 그릇받침[爐形器臺] 그리고 특이한 형태의 파배(把杯) 등을 비롯한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보아, 유적의 중심연대가 인근 황사리고분군(篁沙里古墳群)과 비슷한 4세기대로 추정되고 있다. 윤외리고분군은 함안 외곽지역의 4세기대 묘제(墓制)와 토기문화 연구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함안 도항리 마갑총 및 주변 고분 (咸安 道項里 馬甲塚)

함안 도항리 마갑총 및 주변 고분 목록
유적명 함안 도항리 마갑총 및 주변고분(咸安 道項里 馬甲塚 및 周邊古墳) 시대 삼국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2년 6월 ~ 7월

함안 마갑총(馬甲塚)은 1992년 6월, 이 지역의 한 아파트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비늘모양의 갑옷 쇳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제보에 의해, 구제발굴(救濟發掘)이 실시되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함안 도항리고분군의 북쪽 능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마갑총에서는 삼국시대의 대형 덧널무덤[木槨墓 ; 馬甲塚]과 삼한시대의 널무덤[木棺墓] 하나씩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등의 철기 80여 점 및 토기 29점과 함께, 말갑옷[馬甲] 1개체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출토됨에 따라 한국의 고고학계는 물론 한 · 일 고대사학계에 크게 주목받았다. 마갑총은 이미 공사로 인해 유구의 북쪽이 반파된 상태였으나 바닥 상면(床面)에는 자갈돌을 이용한 시상(屍床)과 관대(棺臺)가 마련되어 있었고, 마갑총과 중복된 채 확인된 목관묘에서는 짧은목항아리[瓦質短頸壺]와 긴목항아리[組合牛角形把手附長頸壺]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2001년 4월에 마갑총에서 북쪽으로 불과 20여m 떨어진 주택신축부지(도항리 101-5번지)에서도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2기가 우연히 발견되어 긴급발굴을 실시하였다. 기저부만 남은 석곽에서는 굽다리접시[火焰文透窓高杯], 그릇받침[鉢形器臺], 금귀걸이(金製耳飾), 미늘쇠[有刺利器] 등 모두 33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마갑총과 주변 주택부지의 발굴을 통하여 2~3세기대의 목관묘에서 5세기 중반경의 목곽묘로, 다시 5세기 후반경의 수혈식석곽묘에 이르는 함안지역 묘제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함안에서 출토된 말갑옷과 투구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대 마구류(馬具類)의 연구 뿐 아니라, 고구려 · 왜 · 중국남북조 등과 서로 관련된 기승용마장구(騎乘用馬裝具)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창원 가음정동패총 (昌原 加音丁洞貝塚)

창원 가음정동패총 목록
유적명 창원 가음정동패총(昌原 加音丁洞貝塚) 시대 삼한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1년 11월 ~ 12월

창원 가음정동패총(加音丁洞貝塚)은 가음정동고분군과 성산패총에 인접한 작은 구릉지[堂山]의 해발 50m 지점에 위치한다. 4개의 조개무지 가운데 한 구역을 대상으로 학술발굴을 실시한 결과, 삼한시대(三韓時代)에 형성되기 시작한 패각층(貝殼層)과 환호(環壕)유구를 확인하였다. 패총은 4개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갈색 연질토기(軟質土器)와 회흑색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주로 제2문화층에서 공반 출토되고, 가음정동고분과도 관련이 있는 회청색 경질토기(硬質土器)는 최상층에서 소량 수습되었다. 삼한시대 취락의 방어시설인 환호는 조사구역 북동편에서 약 10m 가량 확인되었는데, 제3 · 4문화층을 파내고 설치했으며 폐기 후에는 다시 2문화층이 형성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토기 및 철기 외에 그물추[漁網錘], 가락바퀴[紡錘車], 원형 토제판과 함께 골각기(骨角器), 동물뼈, 다량의 어패류 등이 확인되어, 당시의 활발했던 어로활동을 비롯하여 식생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창원 성산패총 (昌原 城山貝塚)

창원 성산패총 목록
유적명 창원 성산패총(昌原 成山貝塚) 시대 청동기시대 ~ 삼한시대
지정 사적 조사기간 1991년 10월 ~ 11월

창원 성산패총(城山貝塚)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에 알려진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에 걸치는 조개무지유적[貝塚]으로, 1968년의 소규모 발굴에 이어 ’74년 창원공단 조성 시 대규모 발굴이 실시된 바, 국내에서 최초로 철 생산 및 가공 관련유구가 발견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이후 ’76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정비 후 유적공원으로 활용되다가, ’91년 태풍에 의한 산사태로 유적의 일부가 훼손됨에 따라 같은 해 10~11월에 긴급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유적의 층위는 12개의 퇴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8~12층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는 일부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와 함께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가 주종을 이루며, 토기의 아가리[口緣部]는 직립한 것과 내만한 것으로 나뉜다. 8~10층의 민무늬 심발형토기는 내만하는 형태이며, 11~12층에서는 단사선문과 공열문(孔列文)에 구순각목(口脣刻目)이 결합된 토기가 출토되었고, 10층에서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와 골아가리토기[口脣刻目土器]가 출토되어 시간적 선후관계를 짐작케 하고 있다. 석기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및 원형유공석기(圓形有孔石器), 돌낫[石鎌], 돌끌[石鑿], 숫돌[砥石], 공이 등이 출토되어 당시에 다양한 석기들이 제작,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 도항리 암각화고분 (咸安 道項里 岩刻畵古墳)

함안 도항리 암각화고분 목록
유적명 함안 도항리 암각화고분(咸安 道項里 岩刻畵古墳) 시대 청동기시대 ~ 삼국시대
지정 조사기간 1991년 4월 ~ 7월

함안 도항리 암각화고분(城山貝塚)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에 알려진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에 걸치는 조개무지유적[貝塚]으로, 1968년의 소규모 발굴에 이어 ’74년 창원공단 조성 시 대규모 발굴이 실시된 바, 국내에서 최초로 철 생산 및 가공 관련유구가 발견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이후 ’76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정비 후 유적공원으로 활용되다가, ’91년 태풍에 의한 산사태로 유적의 일부가 훼손됨에 따라 같은 해 10~11월에 긴급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유적의 층위는 12개의 퇴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8~12층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는 일부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와 함께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가 주종을 이루며, 토기의 아가리[口緣部]는 직립한 것과 내만한 것으로 나뉜다. 8~10층의 민무늬 심발형토기는 내만하는 형태이며, 11~12층에서는 단사선문과 공열문(孔列文)에 구순각목(口脣刻目)이 결합된 토기가 출토되었고, 10층에서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와 골아가리토기[口脣刻目土器]가 출토되어 시간적 선후관계를 짐작케 하고 있다. 석기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및 원형유공석기(圓形有孔石器), 돌낫[石鎌], 돌끌[石鑿], 숫돌[砥石], 공이 등이 출토되어 당시에 다양한 석기들이 제작,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원 가음정동고분군 (昌原 加音丁洞古墳群)

창원 가음정동고분군 목록
유적명 창원 가음정동고분군(昌原 加音丁洞古墳群) 시대 청동기시대 ~ 삼국시대
지정 경상남도 기념물 조사기간 1991년 4월 ~ 7월

창원 가음정동고분군(加音丁洞古墳群)은 목곽묘 9기, 횡구식석실분 2기, 횡혈식석실분 1기, 옹관묘 2기, 그 외 소형 석곽 6기 등 다양한 형태의 매장유구가 확인되어 이 지역 묘제(墓制)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며, 여기에서는 토기 92점, 철기 55점, 장신구류 8점 등 총 155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덧널무덤[木槨墓]은 주로 머리방향[頭向]이 동쪽을 향한 채 동서로 긴 장방형 형태이며, 유물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굽다리접시[高杯], 짧은목항아리[短頸壺], 입큰항아리[廣口小壺] 등의 토기류와, 화살촉 · 손칼 · 끌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은 평면형태가 세장방형(1호 석실) 또는 방형(2호 석실)이며, 장축은 모두 동서방향에 가깝고 횡구부는 서쪽 단벽에 마련되어 있다. 1호 석실에는 자갈로 된 시상(屍床)을, 2호에는 할석으로 마련된 별도의 관대(棺臺)가 있어 추가장(追加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조성연대는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추가장한 시기는 대체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은 반지하식으로 평면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고, 남쪽 단벽 중앙에 비교적 짧은 연도(羨道)가 설치되어 있다. 석실 바닥에는 3종류의 시상이 설치되어 있어, 6세기 전반쯤에 초장(初葬)된 이후 최소 2회 이상 추가장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음정동고분군은 일찍이 금관가야(金官伽耶)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의 문화적 영향력 아래로 서서히 편입되어 가다가, 6세기 중반 이후 가야의 멸망과 더불어 신라의 문화권으로 급속히 흡수되어 가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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