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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충주 '중원' 명칭 7세기 말 탄생"…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세미나
작성부서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작성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보도일 2019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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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의 옛 지명인 '중원(中原)'은 7세기 말에 탄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노명구)는 27일 충북 충주시 금릉동 연구소 강당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중원문화의 새로운 이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는 '중원의 등장과 변천'이란 주제 발표에서 "중원이란 명칭은 통일신라기 문무왕 말엽에서 신문왕대에 걸쳐 5소경(小京) 체제가 성립하면서 등장했던 명칭으로 판단한다"며 "이때 국원경에서 중원소경으로 개칭됐던 것으로 보여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경덕왕 때 나오는 중원경이란 명칭은 중원소경을 중원경으로 개칭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재위 기간이 8세기 중엽인 경덕왕(742~765) 때 중원경으로 고치기 전 중원소경이 이미 존재했고, 이는 7세기 중·후반에 걸쳐 재위한 문무왕(661~681) 말엽에서 신문왕(681~692) 시절이라는 게 홍 교수의 분석이다.

홍 교수는 나당전쟁이 676년 끝나고 통일 이후 678년부터 685년까지 원주에 북원소경, 김해에 금관소경, 청주에 서원소경, 남원에 남원소경을 차례로 설치한 것은 그 중심인 중원을 전제로 방위에 따르는 명칭을 소경에 붙인 것으로 해석했다.

신문왕 때 사망한 강수(强首·?~692)에 관해 삼국사기 열전에 '中原京 沙梁人(중원경 사량인)'이란 기록을 들어 신문왕대에 이미 중원경(중원소경)이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홍 교수는 문무왕 13년(673)에 국원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나당전쟁 중에는 충주를 국원으로 했고, 전쟁이 끝난 문무왕 말엽과 신문왕대에 국원이 중원(중원소경)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봤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경덕왕 때 처음으로 중원경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때 중원소경이 중원경으로 바뀐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홍 교수의 주장이다.

중원이란 지명은 이후 나말여초에 중원부로 나타나고 고려시대에 중원도와 중주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1956년에는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하면서 살미·이류·주덕·신니·노은·앙성·가금·금가·동량·산척·엄정·소태 12개 면이 중원군으로 편재되면서 중원이란 옛 명칭이 부활했다.

이후 1996년 시·군 통폐합으로 충주시에 통합하면서 중원이란 이름은 지명에서 사라지고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중원문화재단, 중원로타리클럽 등 일부 기관·단체 등에 남아 있다.

이날 학술세미나는 홍 교수 외에 ▲중원의 옛 유물과 유적-고고학자료를 통해서 본 중원문화(한지선·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백제의 남한강 진출과 그 과정-제철기술을 중심으로(김경호·호서문화연구원)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배경과 고구려 점령의 의의(전덕재·단국대) ▲충주 탄금대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조순흠·서원문화재연구원) ▲산성으로 본 충주지역의 전략적 입지와 방어체계(백영종·한성문화재연구원)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중앙잡) 고찰(정태은·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길경택 예성문화연구회장과 성정용 충북대 교수를 좌장으로 한 토론이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앞으로도 고대 중원문화권 유적·유물 학술조사연구 추진으로 삼국의 문화가 교차하고 신라 중원경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가 자리했던 중원의 역사 문화적 실체를 밝히는 조사·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ksw64@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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