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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릉 굴산사 관련
작성자 최 * 순
작성일 2013년 11월 14일 23시 27분
조회수 5453
신행결사(信行結社)를 신앙결사(信仰結社)로 쓰는 분들은 한반도의 유적을 맡길 수 없다.

강원일보 2013년 10월 29일 4면/강원도민일보 10월 30일/ 강릉신문 11월 6일의 기사에 관하여 부치는 글입니다.

신행의 삼계교는 북쪽 땅 산동성 이북 사람들의 문화에서부터 태동하여 보편화 하였던 홍익인간 정신이다. 홍익인간 정신이란 고조선 까지 추적하는 북방 사람들의 지도자 정신이었다.
그들은 한평생 40세(평균년영 40미만시대)도 못사는 짧은 현세의 인생 한평생이 너무 허무함으로 내세에 조상들이 살고있는 별나라(북두칠성과 북극성)에서 영원히 조상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미래의 꿈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인생 한평생의 짧은 허무주의에 위안을 가지고(원시종교관) 살았다. 다만 곧 돌아가 뵈올 조상에게 후손들을 위하여 떳떳이 현세를 살았다는 자부심은 민중(중생)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였다는 실적을 쌓아야 한다. 그 봉사정신이 동양 도교학의 근본이며 그 원시종교가 불교와 융화하는 과정에서 신행의 삼계교의 교의를 낳게 하였다. 신행(信行540-594)화상은 구족계를 벗어 버리고 삼계교를 개창하여 많은 사람들에 환영을 받으며 수나라 재상 고경(高熲, 542년경 ~ 607년)의 부름을 받아 장안(남쪽)으로 내려가서 삼계교를 전하며 장안의 화도사에서 삼계교의 전성기를 이루며 종남산 백탑사에서 삼계교 성지를 제창하지만 당나라의 측천무후 공포정치시대를 지나며 돈황 석굴속에 모든 삼계교의 역사는 생매장 하여버리지만 이미 북종선 신수(神秀605-706)로부터 고구려 문화로 정립되어 한반도에는 도교와 불교의 융화과정에서 일반화 되어가는 때에 의상(義相625-702)의 화엄학이 지엄으로부터 전수되어 661년 귀국 이후 추동에서의 선원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후원을 받으며 한반도의 민중 중생불교가 꽃을 피우려 할 때 하택신회의 무차대회(河澤新會의 無遮大會(732)로 북종선 신수의 역사와 함께 닮은 꼴 삼계교의 교의는 무력화 하며 한반도의 화엄학에 따른 중생불교를 시기하며 파손문화로 몰아가는 역사가 졸고 “의상학 금단의 시기”이며 일명 현기(懸記)의 시대로 운하에서의 선원 결사를 말하는 것이다. 삼계교는 중생(민중)불교로 귀족불교(왕도불교. 중국불교. 당나라 불교)와 상반되는 가치관의 원리로 지금도 설명되는 부분이다.
오대산 신행결사는 태종 무열왕계 왕실로부터 진행된 역사이며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물리칠 때 까지 결사를 하였던(문무왕 화랑도) 사기로 오대산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상원사뒤)에서 실시하였었다. 결사(結社)란 목적하는 뜻이 이루어 질 때 까지 헤어지지 않고 염불을 외우며 결사행위를 하는 것이다. 때로는 1만일을 기준하여 30년 한 평생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blog.naver.com/cdsdcc 관동대학교 평생교육원 우리문화 콘텐츠학 “제10강 오대산 5대사”(2013년 11월 5일 화요일) 태종무열왕 왕실이 수행하는 오대산 신행결사에서 끝내 항당운동을 함을 알아차린 780년 경신정변을 맞으며 신라의 왕실은 내물왕계 선덕왕으로 변하는 정변을 맞는다. 그리고 오대산은 월정사를 중창하며 화동의 쌍계사와 함께 귀족불교로 탈바꿈을 하였다.(졸고-3납기 제6강-쌍계사편) 삼국유사는 자연스러운 정변으로 김주원이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명주왕으로 봉을 받는 것으로 쓰고 있으나 오대산 신행결사는 끝내 당나라 귀족 왕도불교의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는 역사이다.(졸고 제11강 의상과 무상에 연좌된 태종무열왕계) The underground buddhism by kings of silla 신라왕실이 인정하여 주는 불교정신은 중생(민중)불교이었다. resistance buddhism 시대를 살아간 태종 무열왕계의 왕실에서 수행하던 오대산 신행결사는 현장을 다녀 보면 1300전 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blog-제10강 오대산 오대사) 심희(審希855-923)선사가 黑巖禪院에 있을 때에 홍준(洪俊882-939)이 찾아온다. 그 당시 대성사(현-구정면 학산리 00번지)와 청학사(구정면 학산리 00번지)에 선원이란 움막은 있었을 수 있으나 구정면 학산리에 굴산사란 없었다. 그곳은 병사들이 훈련을 하던 모래사장이고 덩그마니 돌기둥 두 개가 우뚝 서있으며(그것은 당간지주가 아니다) 말을 타고 격구희를 즐기는 격구장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학이 많이 날아와 노니는 연못이었다. 신행결사의 Root-오대산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각 암자 또는 선원과 보현산 지장선원 흑암산 흑암선원의 현 대성사와 칠성암(법왕사)은 남쪽으로 영월의 흥녕사(현법흥사) 서쪽으로 여주 혜목산의 고달선원과 북 쪽으로 양양의 선림선원 진전사 설악산의 억성사 봉정암 고성의 건봉사가 금강산으로 연계되었다.
굴산사지에서 발굴된다는 오대산 금강사 명문기와는 오대산의 남대의 금강문과 연관이 있으며 문무왕의 기린각과 같이 보이는 곳이며 요나라 연호를 말하는 천경3년이란 년호는 요나라 9대 천조황제 야율연희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를 새겼다면 당나라의 귀족불교를 규탄한 요나라 삼계교의 중생불교의 유적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약2㎞ 상류지대의 흑암선원과 대성사 칠성암(현법왕사)에서 굴러 들어온 유적들이며 현재의 굴산사지란 부지는 병사들이 훈련을 위하여 주둔하였던 유적들이 출토 될 뿐이며 귀족불교의 사찰로 둔갑시키려는 전략적인 동북공정의 귀족불교 사찰을 강제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한다.
답사자들이 오대산 신행결사를 오대산 신앙결사로 설명하는 저의를 우리 선조들의 신성한 독립정신의 항당 역사를 오도 희석시키는 동북공정의 모략을 사주하는 표현으로 국립중원문화재 연구소 소장 김삼기 팀원 및 관계되는 모든 분들은 우리지역 문화재를 올바르게 발굴하여주는 일을 맡길 수 없으며 신뢰 할 수 없는 팀이라고 규탄한다.(졸고 3납기-무차대회 14강은 굴산사에 관하여 특강의 원고가 발표될 것이다.2013년 12월 첫주 )
또 한가지 강원도민일보 10월 29일자 15면 “굴산사지 연구총서” 발간은 천리안이 아직 접하지는 못하였으나 보림전(801)과 경덕전등록(1004)이 현기의 시대에 작성된 부분을 분명히 하여야 하며 마조도일을 남종선에 잡아 매인 법계를 정정하지 못하고 발간하였다면 그도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임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천리안은 관동대학교 평생교육원 우리문화콘텐츠학 무차대회 구산선문 금석문 탐구란 강죄에서 한반도에 9세기를 전후하여 세워진 구산선문의 비탑과 부도탑은 모두 중압석(重壓石*)으로 규정한 내용을 blog로 공개하고 있다. (*)-무거울중,누를압,돌석-士氣가 있는 땅에 士氣를 혼돈시켜 본래의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하여 무거운 돌을 조작하여 놓은 것) 즉 한반도의 모든 중압석에는 현기의 시대에 잘못 쓰여진 해설문 일명 보조비문을 세우므로 우리문화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구산선문 현창운동”인 것이다. 먼저 구산선문 현창운동가들은 online에서부터 그 작업을 수행하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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