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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산 화엄사는 신라 황룡사이다
작성자 조 * 호
작성일 2018년 10월 30일 14시 10분
조회수 2019
어느 치매 걸린 노파가 어린 손자를 찾는다고 동네 한 바퀴 기웃거리며 다 돌고나서 지쳐 집에 돌아와 어깨가 무지근하여 정신 차리고 보니 정작 찾던 손자는 자신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
경주시와 관계기관에서는 고려 몽고병란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신라 황룡사를 복원한다고 어언 50여 년 동안 매년 막대한 국가 예산을 탕진해 왔고, 경주시에서는 무려 1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책정하고 신라 왕궁과 황룡사 복원을 추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경주는 신라도읍지가 아니고 황룡사는 몽고병란 이후에 곧바로 중건되어 지금까지도 건재하다고 한다면 온 나라가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지난 2014년에 ‘신라 황룡사의 위치와 화엄사 출토 진신사리 연구’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라 천년의 도읍지는 신선세계로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에 있었으며, 신라 황룡사는 현재의 화엄사이고 지난 95년 화엄사 서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진신사리 22과(顆)는 황룡사 구층탑에 봉안되었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라는 내용으로 발표하였고, 2015년에 ‘신라 황룡사와 왕궁복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제목으로 황룡사지 출토 유물의 허구성을 지적하여 황룡사 구층탑은 화엄경 변상도에 나오는 8각 구층탑이라는 내용으로 학계에 발표한 바 있다.
거듭하여 금년(2018)에 그간의 연구 성과물을 종합하여『삼황오제는 조선의 황제』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통해 ‘신라 황룡사는 지리산 화엄사이다.’ 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황룡사 복원과 관련하여 관계기관에서 발표하여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연구 성과와 출토유물 등을 중심으로 허와 실을 거론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일반에 알려진 경주 황룡사 터와 초석 출토유물 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그렇게 칭한다.

신라 황룡사는 고려 몽고병란으로 소실되어 폐사(廢寺)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고의로 역사를 치밀하게 날조한 것이다. 고려는 불교국가이고 황룡사는 신라 삼보(三寶) 중에 구층탑과 장육존상이 봉안된 시대를 초월하여 국가 제일의 비보(裨補)사찰이기 때문에 구층탑만 복원되지 못하였을 뿐 장육전을 비롯한 모든 가람은 이미 고려시대에 곧바로중건되었던 것이다.
특히 장육존상이 봉안된 황룡사 장육전(丈六殿)은 신라 문무왕 14년(674) 7월에 태풍이 불어 황룡사의 불전(佛殿, 장육전)을 무너뜨렸다.
이때 의상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화엄사(황룡사)를 화엄 십찰(華嚴十刹)의 종찰(宗刹)로 삼고 왕명을 받들어 2층 석조 장육전(丈六殿)을 중건하고 법당의 4면 석벽에『화엄경』을 새겼다.
현재 학계에서 황룡사가 몽고병란으로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석조 장육전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도 건재했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파괴되고 조선 숙종 때에 그 자리에 현재의 각황전을 중건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인해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들이 전소되었지만 숭유억불의 와중에서도 전란이 끝난 후 주요 사찰들이 대부분 중건되었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엄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① 화엄사는 지리산 기슭에 있다. 범승(梵僧)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이 절을 창건했다.
② 화엄사에 한 불전(佛殿)이 있는데 사면 벽에 진흙을 바르지 않고 모두 푸른 석벽(石壁)을 만들어 그 위에『화엄경』을 새겼다. 세월이 오래 되었으나 석벽이 아름답고 문자가 닳아 없어져 읽을 수가 없다.
③ 어머니가 이고 서 있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세속에서 연기(煙氣)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땅이라고 한다.


① 은 화엄사 창건과 창건주에 대해 밝히고 있다.
② 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현재 각황전의 전신인 석조 장육전(丈六殿)에 대한 기록이다. 화엄사는 황룡사이고, 이 법당이 바로 황룡사 장육존상이 봉안되었던 장육전으로 황룡사 장육전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도 건재했다.
③ 은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에 대한 기록이다. 서두에서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이 절을 창건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이 기록에서 화엄사 창건 시기와 창건주를 밝히고 있다. 화엄사 최초의 창건에 대해 조선 인조14년(1636) 화엄사에서 간행된 판본 「대화엄사 사적(事蹟)」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번역문]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지 8년째 되는 해가 바로 주 목왕(穆王) 31년 경인(庚寅 B.C 991)년이다. 이 해에 부처님은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을 했다. 이때 우전왕(優填王)은 임의대로 조각하여 불상을 만들려고 하자 목건련(目犍連)이 장인을 데리고 도리천에 올라가 부처님의 32상(相) 80종호를 살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31상(相)을 이룩했다. 그러나 범음(梵音 목소리)의 상(相)만은 조각할 수 없었다.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지상에 내려오실 때에 불상이 허공에 올라가 부처님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니 부처님이 불상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멸도 한 천년 후에 네가 동방의 조정(震朝)으로 나아가 인간과 하늘을 널리 이롭게 하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파사익왕(波斯匿王)의 황금불상(金像)과 아육왕의 동상(銅像)과 오중(吳中)의 석상(石像)과 사자국(師子國)의 옥상(玉像)과 여러 국토중의 은상(銀像)과 유리상(瑠璃像)∙산호상(珊瑚像)∙호박상(琥珀像)∙자거상(硨磲像)∙마노상(瑪瑙像)∙진주상(眞珠像)∙마니보상(摩尼寶像)과 자마금빛의 염부단금상(閻浮檀金像)을 봉안하고 우러러보며 예경하였으니 경인(庚寅)년에 불상을 설치하고부터 금년(1636)까지 2,627년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래로 2585년이다.
- 「대화엄사 사적(事蹟)」 인조 14년(1636) 중관대사(中觀大師) 지음

석가모니 부처님은 78세 때에 마야부인이 살고 있는 도리천에 올라가 선법강당에서 3달 동안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경전을『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이라 하고, 일명『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하신 경이라는 말이다. 그 이듬해 부처님은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3달 동안 설법하고 다시 지상에 내려올 때에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황룡사 터에 내려와 설법하고 그곳에 큰 절이 창건되었는데, 이것이 화엄사(= 황룡사) 최초의 창건이다.
따라서 사적기 본문에 ‘성도하신지 8년’은 48년의 오기(誤記)이고, 이에 따라 경인(庚寅)은 신미(辛未)의 오기이다.
주 목왕 52년 신미년(B.C 950)에 부처님을 영접하러 나왔던 다섯 나라 국왕이 파사익왕이 주조한 황금불상 등을 봉안하고 화엄사가 처음 창건된 해로부터 사적기를 지은 인조 14년까지 2586년이고 금년 2018년까지는 창건된 지 2958년으로 창건 당시는 이곳이 기자조선 도읍지에 해당한다.
대장경의『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신하들이 우전왕에게 아뢰었다.
“저희들이 여래의 형상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공경하고 섬기며 예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그대들의 말이 참으로 미묘하구나.”
신하들이 아뢰었다.
“어떤 보배로 여래의 형상을 조성하오리까?” 그 때 왕은 곧 온 나라 안의 기교가 있는 조각가들에게 명령하였다.
“내가 지금 여래의 형상을 조성하고자 하노라.”
기교 있는 장인(匠人)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왕이시여.” 그 때 우전왕은 곧 우두전단(牛頭栴檀) 재목으로 높이 다섯 자 되는 여래상을 만들었다.
그 때 파사익왕은 우전왕이 높이 다섯 자 되는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사익왕도 나라 안의 교묘한 장인들을 소집하여 명령하였다. “내가 지금 여래의 형상을 조성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즉시 준비하라.” 이 때 파사익왕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떤 보배로 여래의 형상을 조성할까?’
조금 있다가 다시 생각하였다. ‘여래의 몸은 마치 순금처럼 누렇다. 이제 순금으로 여래의 형상을 만들리라.’ 그래서 파사닉왕은 순전한 자마금(紫磨金)으로 높이 5척의 여래상을 만들었다. 그 때 염부제(인간 세상) 안에 비로소 두 개의 여래형상이 있게 되었다. - (중략) -
그 때 다섯 국왕이 세존께 아뢰었다. “지금 이 곳은 묘한 복을 받은 가장 신성한 땅이니, 여래께서 비로소 도리천에서 내려와 이곳에서 설법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에 절을 세워 영구히 보존해 없어지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다섯 왕은 이곳에 절(神寺)을 세우면 긴 세월동안 복을 받으며 절은 끝내 썩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다섯 왕이 여쭈었다. “마땅히 절은 어떻게 세워야 합니까?”
그 때 세존께서 오른손을 펴니 땅 속에서 가섭불(迦葉佛) 시대의 절이 출현하였다. 다섯 왕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절을 지으려거든 반드시 이것을 법식으로 삼으라.”
다섯 왕은 곧바로 그 곳에 큰 절을 창건하였다.
-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28권, 청법품(聽法品)


이것이『증일아함경』에 기록된 화엄사(= 황룡사) 최초의 창건에 관한 내용이다.
『삼국유사』의 신라 선덕여왕이 예언한 세 가지 중에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면서 신라도읍지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하였다.
또 가섭불 연좌석 조에, 황룡사 불전(佛殿, 장육전) 후면에 석가모니불과 가섭불(迦葉佛)이 앉아 설법하였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도리천이고 4사자 3층 석탑이 있는 곳이며,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지상에 처음 내려오신 곳에 창건된 절이 바로 화엄사 최초의 창건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이고 서 있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煙氣)와 그의 어머니가 화신(化身)하신 곳’이라는 구절은 이곳이 바로 도리천이라는 뜻이고, ‘황룡사 불전(佛殿) 후면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는 구절은 화엄사가 바로 황룡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최대 희생양은 도리천이 있는 신성구역인 황룡사였다. 이씨조선은 황룡사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역사서 개간을 통하여 황룡사가 있는 신라도읍지를 지금의 경주 지역이라고 날조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오늘날까지 이런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황룡사의 창건과 위치

1. 황룡사의 창건

삼국시대 황룡사의 창건에 관해『삼국사기』에서 말하였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바꾸어 절로 창건하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고 하였다.
27년(566) 황룡사 짓는 공사가 끝났다.
35년(574) 봄 3월에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주성(鑄成)되었는데 구리의 무게가 3만 5천 7근이요, 금으로 도금한 무게가 1만 1백 98푼(分)이었다.
36년(575)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눈물을 내서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선덕여왕 14년(645) 3월에 황룡사의 탑을 처음 조성했는데 이는 자장의 청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융성했던 신라 불교의 중심 사찰인 황룡사는 창건 동기부터, 인도 아육왕이 불상을 조성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그 황철(黄鐵)과 황금을 빈 배에 싣고 바다에 띄워 1,300여년을 지나 진흥왕 때에 저절로 신라에 이르러 주조한 장육존상의 조성, 천신의 계시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조성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유골을 봉안했던 공덕으로 천신의 도움에 힘입어 신라가 당나라까지 이기고 삼국의 영토를 다 차지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불가사의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신라 삼보(三寶) 중에 장육존상과 구층탑이 황룡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라 불교에서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황룡사는 월성(月城)의 동쪽에 창건되었는데 월성은 신라 궁실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삼국유사』에서는 황룡사의 위치에 관해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이라고 했다.

파사왕 22년(101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月城)이라고 했다.
이해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와 같이 황룡사와 신라 궁실은 거의 같은 구역에 있었으므로 황룡사의 정확한 현재의 위치를 밝히는 일은 신라 천년의 도읍지가 어디인가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황룡사의 위치에 관해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영남으로 유람 가는 일암(一菴) 전 상인(專上人)을 보내며’(送一菴專上人遊嶺南)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곧장 계림(鷄林)에 이르러 좋은 경치 찾노라면,
황룡사(黃龍寺)는 옛 여섯 자라(六鼇) 머리에 있다네.


여기에 ‘여섯 자라의 머리(六鼇頭)’에 관해서는,『열자(列子)』탕문(湯問) 편에 ‘발해(渤海)에 선인들이 사는 5신산(五神山)이 있었는데,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호(方壺 방장산), 넷째는 영주(瀛州), 다섯째는 봉래(蓬萊)이다. 그런데 용백국(龍伯國)에 대인(大人)이 있어 한 낚시로 두 산을 머리에 이고 있던 여섯 마리의 자라들을 연달아 낚아버려, 이에 대여(岱輿)와 원교(員嶠)의 두 산은 大海속에 가라앉아서 지금은 방호(方壺 방장산)․영주(瀛州)․봉래(蓬萊) 삼신산만 남아있다.’는 고사(故事)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 ‘계림(鷄林) 땅은 오산(鼇山)의 곁에 있다.(鷄林地在鼇山側)’는 구절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섯 자라의 머리라는 구절은 금오(金鼇)가 머리에 이고 있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에 황룡사가 있다는 것으로 화엄사 사적에 현재의 화엄사가 신라 황룡사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천연적인 물증이 된다.


2. 화엄사의 창건

판본『대화엄사 사적(事蹟)』에는 삼국시대 화엄사의 창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번역문〛
양(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년에 신라 법흥왕이 즉위하고 15년 무신(戊申, 528)년에 불법이 크게 성행하여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왕비 기축부인(己丑夫人)이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법흥왕은) 법명을 법류(法流)라 하였으며 율령(律令)을 지키고 행하였다. 이리하여 혹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혹은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 혹은 화엄법운사(華嚴法雲寺)라고 하는데 계림고기(雞林古記)에는 혹 황둔사(黃芚寺)라고도 했다.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니 뒤로는 노을 이는 봉우리에 기대고 앞으로는 구름 이는 시내를 진압한다. 양 무제 대동(大同) 12년 신라 진흥왕 5년 갑자(甲子, 544)에 창건했다.

이 해에 진흥왕이 어머니 지소부인(只召夫人)을 위하여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중과 여승이 되도록 하고 널리 불찰(佛刹)을 일으켰는데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호를 법운자(法雲子)라고 했다.
또 황룡사(皇龍寺)를 낙성하고 장육동상(丈六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5만 5천 7근(斤)이요, 금 1백 2냥을 도금(鍍金)했다.

당 명황 천보(天寶) 13년 신라 경덕왕 13년 갑오(甲午, 754)년에 조술(祖述)했다.

이해에 경덕왕이 어머니 조덕태후(照德太后)를 위하여 황룡사종(皇龍寺鍾)을 주조하였는데 길이가 10척 3촌(一丈三寸)이요, 두께가 9촌(寸)이며 무게가 49만 7천 5백 81근(斤)이었다.
이 시기에 또 김대성(金大成)이 창건한 토함산의 佛國寺가 있으니 뒷사람들은 이름에 현혹됨이 없도록 하라.

〚해설〛
신라 법흥왕 때에 이차돈의 순교로 인하여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도입되고 법흥왕 때에 절 짓는 공사가 시작되어 진흥왕 즉위 5년(544) 봄 2월에 흥륜사(興輪寺)를 낙성하였는데 이것이 화엄사 최초의 창건이다.
거듭하여 이 골짜기에 황룡사가 창건되었는데, 진흥왕 14년(553) 봄 2월에 왕명으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새 궁궐을 월성(月城)의 동쪽에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곳에 나타났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궁전을 고쳐 절로 삼고 이름을 내려 황룡사라고 했다.
이것이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이다.
화엄사의 원래 이름은 화엄불국사이며, 이는 이곳이 화엄경의 설법 무대이고 불보살이 살고 있다는 수미산 도리천(忉利天)이 있는 불국토라는 말이고, 화엄법류사와 화엄법운사의 법류는 법흥왕의 법호이고 법운은 진흥왕의 법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경덕왕이 화엄사를 크게 중창하고 화엄사상을 부흥시켰던 사실로 이어지는데, 이 내용은『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으로 경덕왕 13년 갑오(甲午, 754)년에 왕이 화엄종의 대덕 법해에게 청하여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강설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듬해 갑오(甲午, 754)년 여름, 경덕왕은 또 대덕 법해(法海)를 청하여 황룡사에서『화엄경』을 강설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웠다.
조용히 법해에게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태현법사가『금광명경』을 강설하니 우물의 물이 일곱 길이나 솟아올랐소. 스님의 법도(法道)는 어떠하오?” 법해는 말했다.
“아주 조그만 일이온데 무엇을 그렇게 특별히 칭찬하십니까? 즉시 창해(滄海)를 기울여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아직 그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겼다. 정오에『화엄경』을 강설할 때에 이르러 향로를 당겨 잠잠히 있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갑자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궁리(宮吏)가 달려와서 보고 했다.
“동쪽 못이 이미 넘쳐흘러서 내전(內殿)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은 망연자실 하였다. 법해는 웃으면서 말했다.
“동해물이 기울어 쏟아지려고 수맥(水脈)이 먼저 넘친 것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절을 하였다. 그 이튿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한 낮에 바닷물이 넘쳐흘러 불전(佛殿)의 계단 앞에까지 들어 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왕은 법해를 더욱 믿고 공경했다.
찬양한다.

법해(法海)의 파란을 보라, 법계는 넓기도 하다지만
사해(四海)를 넘치게 하고 줄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다.
백억의 수미산을 크다고 말하지 말라,
모두 우리 대사의 한 손가락 끝에 있도다.
『삼국유사』 4권 유가종의 태현과 화엄종의 법해


이리하여 경덕왕이 이 해에 화엄사(황룡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무게가 봉덕사종의 4배에 해당하는 49만 7천 5백 81근(斤)의 황룡사 대종을 주조하였다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한편 지난 1978년 민간인으로부터 입수하여 국보 제196호로 지정된 「신라백지묵서화엄경」 이 발견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 조성기인 발문(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천보(天寳) 13년 갑오년(754) 8월 1일에 시작하여 을미년(755) 2월 14일에 1부를 두루 마치어 이루었다. 제작하도록 발원한 이는 황룡사(皇龍寺) 연기법사(緣起法師)이니, 제1은 은혜를 주신 부모를 위한 것이고, 제2는 법계(法界)의 일체 중생이 모두 불도를 이루도록 서원하였다.


이 필사본 화엄경은 현재 학계에서도 화엄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작 연대가 삼국유사와 화엄사 사적(事蹟)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화엄사 사적(事蹟)의 현액(懸額) 편에서 황룡사 대종을 매달았던 범종각(梵鍾閣)이 3층 3칸의 규모로 화엄사에 있었고, 자장법사가 세운 구층 세존사리탑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조선시대 간행된 구례읍지인『봉성지(鳳城誌)』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에 칙령(勅令)으로 화엄사를 거듭 새롭게 중창하였는데, 그때에는 큰 절이 여덟이요, 여기에 81암자가 속해 있었다.

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백지묵서화엄경 조성 시기와 일치한다.
이것은 지금의 화엄사가 바로 황룡사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8寺 81암자에 각각 이름이 있었으며 이를 통칭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라고 한다.
화엄사의 본래 절 이름이 화엄불국사인데, 경주 토함산에 불국사라는 이름의 절이 또 있으므로 불국사 사적기에 화엄불국사를 화엄종불국사라고 개작하여 화엄사 관련 역사 자료를 불국사 사적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화엄사 사적에 "이 시기(경덕왕때)에 또 김대성(金大成)이 창건한 토함산의 佛國寺가 있으니 뒷사람들은 이름에 현혹됨이 없도록 하라." 는 구절은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판본 사적에는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망덕사(望德寺), 그리고 신라 말기의 대 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머물렀다는 월류봉(月留峰) 아래의 청량사(淸凉寺)가 모두 화엄사 골짜기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8寺 중에 흥륜사․황룡사․사천왕사 등은 이른바 신라도읍지에 있던 전불(前佛)시대 칠처 가람(七處伽藍) 터이다.
신라 전성기에 8寺 81암자가 어우러져 화엄불국세계를 이루던 화엄불국사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예전의 가람(伽藍)을 다 복원하지 못하고 현재의 화엄사는 8寺 중에 중심 사찰인 황룡사를 우선 복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화엄사가 황룡사라는 사료가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학계에서는 조성기에 나오는 연기법사를 화엄사 창건주로 간주하고, 화엄사 창건 연대를 210년 끌어내려 필사본 화엄경이 제작된 경덕왕 13년(754)이라고 날조하고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행태이다.


황룡사 복원 조감도

우선 황룡사 복원 조감도와 현재 화엄사 가람배치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이 복원 조감도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홍보용으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감도를 보면 구층탑과 3금당을 중심으로 탑의 앞쪽 좌우에 경루(經樓)와 종루(鐘樓)가 있고 주변에 담장처럼 길게 회랑(回廊)이 둘러 싸여 1탑 3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탑과 중심 법당의 일직선상에 남쪽 문과 2층 누대형태의 출입문이 배치되었다.
조감도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화엄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어느 큰 사찰에 가더라도 들어가는 문이 양쪽에 큰 기둥 하나로 받쳐진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금강문(金剛門)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수미산의 사방에서 불국토를 수호하는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天王門)이 있고 그 다음에 보제루(普濟樓)가 배치되는데, 이런 기본적인 가람배치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앞서『증일아함경』에서도 화엄사가 처음 창건될 때 가섭불 시대의 절을 모델로 삼아 창건하였다고 했다.


황룡사 구층탑

조감도의 사각 구층탑과 월정사 팔각 구층탑을 비교해 보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이제까지 황룡사 구층탑의 모형이 사각 구층탑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필자는 이미 지난 2015년 ‘신라 황룡사와 왕궁복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라는 논문을 통해 월정사 팔각 구층탑이 황룡사 구층탑의 모형이라고 발표한 바 있고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1, 조감도에 구층탑의 모형을 보면 마치 주거공간처럼 구층 한옥 형태의 아파트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황룡사 구층탑은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경배의 대상인 신성한 사리탑이지 사부대중이 임의대로 드나드는 누대가 아니다.
신라 황룡사는 현재의 화엄사이고 화엄사는 문무왕 때에 의상대사가 지정한 전국 화엄십찰 중의 중심이 되는 해동 화엄종의 종찰(宗刹)이다.
황룡사 가람배치는 도리천(忉利天)을 중심으로 한『화엄경』의 불국토를 지상에 구현한 것으로 구층탑은 화엄경 변상도의 모형을 본뜬 것으로 이 탑의 모형이 현재 월정사 팔각 구층탑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황룡사 구층탑은 사각형태가 아니라 화엄경 변상도에 나오는 팔각 구층탑의 모형을 본뜬 것이다.

판본 「대화엄사 사적」에 따르면, 자장법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석가모니 진신사리 100과(顆)와 유골 등을 받아 모시고 귀국하여 태화지 못 가에서 현신한 천신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이어서 태화사와 월정사를 창건하고 다음으로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2, 황룡사 불전(佛殿, 장육전) 후면에 ‘가섭불 연좌석’이 있었는데, 연좌석(宴坐石)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과 석가모니불이 설법하실 때 앉았던 돌로 된 좌석이다.
그리고 신라 도읍지에 있는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도리천(忉利天)이 있고, 그 남쪽 아래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고, 도리천 동쪽 아래에 황룡사가 창건되었다.
불경(佛經)에 보면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천국으로 이곳은 석가모니 부처님이『화엄경』을 설했던 곳의 하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3달 동안 설법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황룡사 불전 후면의 연좌석이 있었던 곳이 득도한 성인의 혜안으로 보면 실제로 도리천이 있는 불국토라는 말이다.
그래서 화엄사의 원래 이름이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라고 한 것이다.
불교의 세계 설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 우뚝 솟아 있고 수미산의 중턱에 불국토를 수호하는 사천왕이 사는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고, 수미산 정상에 도리천이 있다. 이와 같은 세계 설에 따라 문무왕이 도리천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이 수미산을 중심으로 욕계(欲界) 6천(六天), 색계(色界) 18천(十八天), 무색계(無色界) 4천(四天) 등 28곳의 불보살이 살고 있는 천국이 모두 수미산을 의지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욕계․색계․무색계를 합쳐 삼계(三界)라고 한다.
황룡사가 신라 불교의 중심 사찰이고 신성시 되는 이유가 바로 불국토인 도리천 인근에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깨우침을 준 게송(偈頌)도 화엄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따라서 황룡사는 큰 산 기슭에 세워진 것이지 들판에 세워진 절이 아니다.

3, 선덕여왕12년 계묘(癸卯, 643)년에 자장법사가 받들고 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100과(顆)와 유골 그리고 부처님이 입던 가사 한 벌 등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3등분하여 황룡사 탑, 태화사(太和寺) 탑, 나머지는 두골과 가사 그리고 사리 4과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 등 세 곳에 각각 봉안하였다.
자장법사가 모셔온 사리 100과 중에 73과와 유골을 함께 봉안한 곳이 현재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이고, 이곳이 바로 세 곳에 중에 태화사 탑이다.

4사자 3층 석탑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는 항복하고 구한은 조공하여 올 것이오.’라는 신인의 가르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가운데 어머니상은 성모의 몸을 하고 있는 신라를 상징하고 네 마리 사자는 당시 말갈 · 왜국 · 고구려 · 백제 등 이웃 침략국을 상징하며 그 앞의 석등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들 상은 구한(九韓)이 조공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장은 귀국하여 신라 불교를 총괄하여 다스리는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먼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워 사리를 모시고, 다음으로 태화사와 월정사를 창건하였다.
이렇게 볼 때 화엄사 사리탑은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게 된 취지가 드러나 있고, 월정사 8각 9층탑은 황룡사 구층탑의 모형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구층 목탑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목재와 석재로 경영하였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탑의 기단부는 석재, 탑신부는 목재로 조성된 것이다.
황룡사 구층탑의 높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찰주기(刹柱記)에 이르기를,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철반 이하는 183척이라 했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 100과(顆)를 구층탑과 통도사 계단(戒壇)및 또 태화사(太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태화지 못가에서 보았던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황룡사 구층탑


여기에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철기둥이 세워진 탑의 상륜부를 말하고 철반 이하는 맨 아래 기단에서 구층 탑신부까지의 높이를 말한다. 황룡사 찰주본기에 ‘철반 이상의 높이는 7보(步) 이하의 높이는 30보(步) 3척(尺)이라’고 하였는데, 6척(尺)을 1보(步)라고 하기 때문에 180+45척으로 구층탑의 총 높이는 225척이다.
이렇게 볼 때 월정사 구층탑은 황룡사 구층탑의 축소판인 것처럼 규모가 흡사하다.
신라에서 사용하는 1척의 단위에 관해서는, 구층탑보다 1세기 후에 주조한 봉덕사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경덕왕이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일장(一丈, 10척) 크기의 종을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 7년(771)에 이르러 만들어졌다.’ 고 하였다.
이는 처음에 경덕왕이 설계했던 규모로 혜공왕 때에 이르러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현재 봉덕사종은 높이가 333cm로 이렇게 환산할 때 구층탑 총 높이 225척은 75m 정도 된다.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천신이 감응하여 상서를 나타내고 그 일이 원만히 성취되도록 은밀히 돕는다.


(자장법사는) 신령한 유적을 두루 답사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 주변에서 용이 현신해서 재(齋)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에게 말했다.
“지난 번 게송을 풀어 주던 노승(老僧)이 바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울 일을 정성스럽게 당부하던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석가모니 진신사리 100과(課)와 유골 가사 등을 자장에게 주었고, 다시 태화지(太和池) 못가에서 서해 용왕이 신인(神人)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자장에게 귀국하여 사리와 유골 등을 3등분하여 황룡사 · 태화사 · 통도사 등 세 곳에 나누어 모시고 아울러 절을 창건하는 위치와 사리를 모시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상세한 가르침이 있었는데, 이것은 물론 문수보살의 계시에 따른 것이다.

4, 황룡사 구층탑은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공사를 처음 시작하여 2년 후인 동왕 14년에 조성된 후로 제 32대 효소왕 때에 처음 벼락을 맞아 경문왕 때에 처음 수축한 이후로 고려 헌종(獻宗) 때까지 무려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불타고 수축을 거듭하다가 숙종(肅宗) 때에 여섯 번째 수축했다.
그리고 몽고병란 때에 불타 없어지고 구층탑은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에는 ‘황룡사탑에 벼락이 쳤다.(震皇龍寺塔) ’ 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벼락을 맞았다(霹靂)’ 고 하고 고려사에는 ‘구층탑이 불탔다.(九層塔灾)’ 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매년 몇 차례씩 연례행사처럼 지나가는 태풍에 벼락을 맞은 정도라면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높이 75m 규모의 목조 건축물이 벼락을 맞아 불이 나고 태풍이 몰아친다고 가정해 보자. 조감도를 보면 높이 솟은 구층탑과 법당이 추녀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배치되어 있다. 지난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기억할 것이다.
지하2층 지상 8층 건물 높이 불과 45m의 건물이 붕괴되는데도 그 정도인데, 현재의 황룡사 복원 조감도대로라면 비록 탑이 붕괴되지는 않았더라도 매번 벼락을 맞아 불탈 때마다 낙하물이 떨어지고 탑이 기울어 황룡사 전체가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황룡사지 출토사리

황수영 박사는 1974년에 학계에 처음 ‘황룡사 찰주본기’ 발표하면서 이것을 입수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황룡사 터는 일제 강점기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1964년 드디어 문화재위원회의 승낙을 얻어 탑지(塔址)로 추정되는 터에 살고 있는 농가(農家)를 철거하고 지표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1964년 12월에 탑지(塔址)로 추정되는 초석 안에서 사리구가 도굴범의 손에 약탈되어 그 유물은 그 직후 서울로 운반되어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다시 도굴 단이 일망타진되어 유물을 회수하여 국고 귀속의 과정을 통하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었는데 찰주본기는 그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황룡사 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이라고 하였다. 월성은 신라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고, 용궁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전문용어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황룡사는 처음 그곳에 새로운 궁전을 지으려고 했는데 그 곳에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계획을 고쳐 절을 창건하고 황룡사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라 궁궐 인근에 창건되었다.
조선 초기의 사관(史官)인 서거정은 문집에서 황룡사는 금오(金鼇)가 머리에 이고 있는 삼신산(三神山)에 있다(黃龍寺古六鼇頭)고 하였고, 판본 ‘화엄사 사적(事蹟)’에는 현재의 화엄사가 황룡사라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어느 문집에도 현재 경주의 어느 위치가 황룡사 터라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에, 서두에서 ‘현재의 황룡사 터는 일제 강점기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주요 유물인 황룡사 찰주본기와 사리구 등은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도굴범에게서 환수조치 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출처는 확인하기 어렵다.
또 내용에서 보듯이 사리를 봉안한 사리함과 사리구는 비록 화재가 나거나 붕괴되더라도 아무런 손상이나 유실됨이 없도록 큰 석판에 홈을 파서 그 안에 봉안하고 다시 석판으로 덮는 구조로 안전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 몽고병란으로 구층탑이 불타서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 고려 조정이나 불교계에서는 신라 3보(三寶) 중의 하나이고, 아무런 손상이 없는 석가모니 진신 사리와 유골 사리구 등을 수습도 안하고 무려 700 여 년 동안 그대로 방치해 두었단 말인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논리이다.
그리고 신성한 경배의 대상인 진신 사리는 지표면 높이의 초석에 봉안하는 법이 아니다.
월정사 구층탑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1970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때 탑의 1층의 탑신과 5층옥개석 두 곳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5층옥개석에 마련된 길이 13.2∼14.2㎝·폭 16㎝·깊이 16㎝의 방형 사리공에 은제도금여래입상이, 1층탑신의 지름 32㎝, 깊이 19㎝의 원형 사리공(舍利孔)에서는 비단보자기에 싸인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보자기 안에는 네 매의 구리거울로 밑면과 주변을 감싼 동합이 들어 있었고, 동합 안에는 은제 사리 합과 금동제방형향합, 사각자수향낭이, 은제 사리합 안에는 담홍색 사리 14알이 든 호리병 모양의 수정 사리병과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두루마리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전신사리경』은 중국 오대(五代)에 유행하여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경전으로, 통일신라시대에 탑 안에 봉안되던『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대체하였다.


월정사 구층탑의 경우 기단부 위로 탑신부 1층에 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정사 구층탑의 모형은 화엄경 변상도에 나오는 구층탑과 동일하고 이것이 황룡사 구층탑의 원형이 되기 때문에 월정사 구층탑에 사리가 봉안된 구조와 위치를 통해 황룡사 구층탑의 사리 봉안 위치를 추론하면 지면에서 기단부를 지나 1층 탑신부의 높이는 지면에서 최소 10여m 이상이 된다. 그런데 어찌 지면과 같은 높이의 반석 홈에 사리를 봉안했겠는가?
한편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지은 ‘석가세존의 금골 사리 부도비’의 비문에 보면, 임진왜란 때에 사리 유통 경로를 자세하게 밝혀 주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황룡사 구층탑에 봉안되었던 사리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자장법사가 세운 세 곳 중의 하나인 태화사 탑에 함께 봉안되어 있었다.
사명대사는 사리가 왜적들에게 약탈될 것을 우려하여 사리탑을 해체하였는데 두 개의 사리함이 함께 모셔져 있었다. 이것을 당시 금강산에 주석하던 서산대사와 상의하여 전란이 끝난 후에 사리 한 함은 사명대사가 본래 있던 부도에 다시 봉안하고 한 함은 서산대사가 1603년 황룡사 구층탑이 있던 옛 터에 석조 부도를 새로 조성하여 사리를 봉안하고 이때 비문을 지어 함께 세운 것이다. 지난 1995년 화엄사 서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22과가 바로 황룡사 구층탑에 모셔진 사리이다.


황룡사지 출토 사리

황룡사 터에서 출토되었다는 사리와 화엄사 서오층탑에서 출토된 사리를 비교해서 보기로 하자. 석가모니 진신(眞身) 사리는 투명하게 보석처럼 빛이 날 뿐 거의 색깔이 없다.
이에 비해 황룡사 터에서 출토되었다는 사리는 색깔이 탁하고 육안으로 보기에 사리라기보다는 돌맹이에 코팅을 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황수영은 황룡사 찰주본기를 학계에 발표하면서 이미 1964년에 도굴범에 의해 구층탑 탑지(塔址)의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1천 수 백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전래하였던 사리구가 도굴범에 의해 약탈되어 도굴범을 일망타진하고 사리구와 찰주본기 등을 입수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찰주본기 보다는 신라 삼보(三寶)중의 하나인 황룡사 구층탑에 모셔진 사리와 사리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중대하고 엄청난 특종 뉴스가 될 터인데, 어찌하여 관계기관에서는 50여년이 지난 근래에 와서야 이것이 황룡사 구층탑에 모셔진 사리와 사리구라고 슬그머니 발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장경 『고승전』에 부처님 진신사리에 관하여 이런 말이 있다.


다음날 아침 강승회는 사리를 가져다가 손권에게 바쳤다.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모두 모여 바라보았다.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사리병 위로 뻗쳐 나왔다. 손권이 직접 손으로 구리 쟁반 위에 병을 기울이자, 사리가 부딪쳐 쟁반이 곧 깨어지고 말았다.
손권은 몹시 두려워서 놀라 일어나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상서로다.”
강승회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사리의 신비로운 위엄이 어찌 다만 광채를 발하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사르는 불로도 태울 수 없고, 금강(金剛)의 방망이로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손권은 명령을 내려 그것을 시험하였다. 강승회는 다시 맹서하여 말하였다.
“진리의 구름이 사방을 덮으면, 모든 백성들이 그 은택에 우러러 젖게 됩니다. 원하건대 다시 신비로운 자취를 드리우시어, 널리 위엄 서린 영험을 보여 주소서.”
이에 사리를 쇠로 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힘이 센 자에게 내려치도록 하였다. 쇠로 된 다듬잇돌은 움푹 파이고, 사리는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손권은 크게 탄복하고 즉시 탑사(塔寺)를 세웠다.


이와 같이 부처님 진신 사리는 ‘세상의 종말을 사르는 불로도 태울 수 없고, 금강(金剛)의 방망이로도 깨뜨릴 수 없다.’ 고 하였다. 이제 황룡사 터에서 출토 되었다는 것은 돌맹이인지 사리인지 공개적으로 시험해 보면 백일하에 진위여부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장육존상 대좌(臺座) 초석


황룡사 터의 주춧돌 같이 3개가 나란히 있는 반석을 황수영은 대좌(臺座)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황룡사 큰 법당의 세 불상을 각각 받치는 주춧돌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은 있어도 불상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큰 반석이 불상의 밭치는 주춧돌이라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건물 전체의 엄청난 무게를 받치는 주춧돌이 불상의 무게를 받치는 주춧돌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규모가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이다.
일반적으로 불상은 법당 안의 중심에 수미단(須彌壇)을 불상의 크기에 따라 1,5m∼2m 높이로 만들고 그 위에 연꽃 문양의 연화좌(蓮花座)를 만들어 그 위에 봉안하는 법이다. 주춧돌은 엄청난 무게의 건물 전체의 하중(荷重)을 받치기 위한 것이지, 장육존상의 무게 고작 3만 5천 7근(斤)에 불과한 무게를 받치기 위해 지표면과 같은 높이에 옆면은 다듬어지지도 않은 거대한 반석 위에 모시지 않는다.

화엄사 각황전(覺皇殿)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황룡사 장육존상은 바로 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숙종 때에 중건하면서 각황전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창건된 지 천년 넘게 내려오던 대법당의 현판을 이때 각황전으로 바꾼 이유는 이 법당이 황룡사 장육전(丈六殿)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장육존상(丈六尊像)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 시에 16척의 키에 황금색 피부였다고 하는데, 부처님 생존 시와 똑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조성한 불상을 말한다.
현재 석굴암 본존불과 화엄사 각황전에 모셔진 불상이 장육존상인데, 앉은 모습으로 가운데 불상의 높이는 3,5m 좌우 불상의 높이는 3,2m이다.
황룡사 터의 대좌를 보면 서로 크기도 다르고 옆면은 다듬지도 않은 것을 보면 장육존상이 안치되었던 대좌이거나 아니면 불상을 받치던 초석이라고 볼 수 없고, 원래 그 자리에 있었거나 일부러 가져다 놓은 자연석을 윗면만 반반하게 깎아 내고 홈을 여기저기 파서 초석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의혹을 짙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불상의 무게를 받치는 주춧돌이라는 것인데, 불상을 받치는 초석이 있다고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전국 어느 사찰에 목조 건축물을 보더라도 둥근 기둥에는 주춧돌도 기둥에 맞추어 둥글게 다듬고, 네모진 기둥에는 주춧돌도 네모지게 다듬어 기둥을 받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황룡사는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이고, 석굴암이나 불국사 석조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라 사찰 석조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다.


치미


치미(鴟尾)는 망새라고도 하는데 기와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 장식하는 기와를 말한다.
그런데 가칭 황룡사 터에서 출토되었다는 치미는 그 높이가 무려 182cm로 성인 남자의 키 높이와 같아서 기와라고 하기엔 어마어마하게 커서 차라리 괴물 같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3국의 고건축의 지붕을 보면 각기 다른 특성이 있다. 가령 일본의 경우 후지산 이미지처럼 비스듬한 형태인가 하면, 한국 사찰의 기와지붕을 보면 산의 능선과도 같이 단아한 형태로 주변 산천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중국 사원이나 궁궐의 지붕을 보면 규모가 광대하고 용마루의 양 끝이 하늘로 치켜 올라간 형태의 장식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황룡사 치미는 전형적인 중국식의 기와라고 할 수 있다.
조감도를 보거나 문헌상으로 볼 때 황룡사의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은 구층탑과 장육존상을 모신 장육전 두 곳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구층탑은 지붕형태의 구층 탑신부 위로 상륜부에 해당하는 42척 높이의 철 기둥이 세워지기 때문에 용마루가 따로 없고, 장육존상이 모셔진 장육전은 현재의 화엄사 각황전 규모인데, 그 정도 크기의 치미가 용마루 양 끝에 배치될 수가 없다.
이것이 과연 황룡사 법당 지붕 용마루 끝에 있었던 것일까?
또한 이것이 크기가 거의 시골 버스 간이승강장 만한 규모인데 몽고병란 때에 지렁이처럼 살아서 땅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황룡사 법당 인근에 큰 산이 있어 붕괴되면서 매몰된 것일까? 현재 황룡사 터는 근처에 산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괴물이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중국 고물상에서 취득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발굴 당시 현장 사진을 공개해야 한다.

옛날 사관(史官)들은 대체로 역사를 서술할 때, 경전을 인용하여 인증하였다. 따라서 융성했던 신라불교의 중심사찰인 황룡사 복원에 대한 연구 역시 고승들의 문집이나 대장경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20세기 초기에 이르러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전통방식이 붕괴되고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면서 문헌보다는 오히려 유물 중심의 사관이 만연하고 있다.
『삼국유사』 탈해왕 조에 이런 말이 있다.


탈해(脫解)가 성 안에 살만한 곳을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살만한 땅이었다. 이에 산에서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주택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아침에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가옥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동자가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떠나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 말에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출토 유물이라는 것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유물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보는 이에 따라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현재 황룡사 터라고 알려진 지역은 철거 이전에 농가가 살던 마을이었고 주변은 농경지였기 때문에 만약 거기에 불교 유물이 있었다면 집 짓고 논밭을 가는 동안 이미 출토되어 세간에 알려졌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습지라서 지반이 약하여 높은 건축물을 세울 수 없는 지역이고, 주춧돌이라고 알려진 석재들은 원래 거기에 있던 자연석이거나 지표조사 이후에 가져다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수영이 이곳을 황룡사 터라고 지목하고 1964년부터 지금까지 어언 50여년간 천문학적인 규모의 혈세를 탕진하며 연구하고 유물을 발굴하고 있으나 발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옛 문헌과 전혀 부합되지 않고 출토 유물이 600여점 혹은 수 만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 터에서 출토된 것인지, 아니면 국내외 고물상에서 수집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동안 황룡사 복원과 관련하여 경주시나 문화재청이나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의 국가기관이나 학계에서 발표한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언 반세기에 걸쳐 투자한 연구비만 하더라도 실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국민의 혈세를 탕진하면서도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조차도 없고, 여전히 황룡사 유물 전시회 운운하며 국민을 기만하고 바보 취급하는 행태는 실로 개탄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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